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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알아가기_독도의 역사 지리(2/9)

by 서울나그네 2015. 3. 27.

독도는 울릉도의 부속 섬으로서 독도의 역사는 울릉도의 역사 안에서 살펴볼 수 있다. 먼저 문헌상 울릉도에 사람이 살았다는 기록은 3세기에 나오기 시작한다.『삼국지(三國志)』권30,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 옥저조(沃沮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옥저의 기로(耆老)가 말하기를 ‘국인이 언젠가 배를 타고 고기잡이를 하다가 바람을 만나 수십일 동안 표류하다가 동쪽의 섬에 표착하였는데 그 섬에 사람이 살고 있었으나 언어가 통하지 않았고 그들은 해마다 칠월이 되면 소녀를 가려 뽑아서 바다에 빠뜨린다’고 하였다.” 여기서 ‘동쪽의 섬’을 우산국으로 볼 것인지 대한 이견이 있었으나, 현재 4세기의 유물이 발견되고 있기 때문에 3세기경에 이미 울릉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했고, 또한 ‘우산국’이라는 국가가 성립되어 있었다는 것을 위의 사료로 추정할 수 있다.

 

우산국의 성립과 발전에 대한 기록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멸망에 관한 기록만을 볼 수 있다.『삼국사기(三國史記)』권4, 지증왕 13년 6월(512년)의 기록에 따르면, 우산국이 지세가 험난하고 사람들이 용맹하여 결국은 하슬라주(강릉)의 군주가 계략을 써서 복종시켰다고 한다. 이는 당시 하슬라주의 군대가 신라 최전방을 담당하던 최정예부대였음에도 우산국을 정벌하기 쉽지 않았다는 얘기로, 우산국의 군사력과 문화수준이 상당히 높은 단계에 있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해준다. 이에 대한 얘기는 현재 사자바위, 투구봉, 나팔봉과 관련된 설화로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고려의 태조왕건이 후백제견훤을 물리치고 후삼국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우산국은 다시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게 된다. 하지만『고려사』권1 태조 13년 8월(930년)에는 “우릉도(芋陵島)가 백길(白吉)과 토두(土豆)를 보내어 토산물을 바침에 백길을 정위(正位)로 토두를 정조(正朝)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통해 고려시대에도 변함없이 울릉도는 한반도의 지배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종 9년에는 여진의 침략으로 농업이 피해를 입자 농기구를 하사해 준 기록도 있다. 고려사에 한 동안 울릉도와 독도에 관한 기록이 나오지 않는데, 이는 여진의 침입으로 그 일대가 황폐화되었기 때문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어 1157년에는 울릉도를 적극 개발하려다 중단한 기록이 나오며, 원 간섭기에는 울릉도의 주민이 고려 조정에 입조한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의 역사를 상세히 기록한『조선왕조실록』에는 울릉도와 독도가 자주 등장한다. 여말선초에 왜구의 노략으로 피해가 심해지자 15세기 초 태종은 주민들의 피해를 우려해 육지에 나와 살도록 쇄환정책을 실시한다. 태종 17년에는 울릉도와 주변 섬을 조사하기 위해 삼척만호 김인우를 무릉등처안무사(武陵等處按撫使)로 임명하였으며, 이후 대책회의에서 ‘우산·무릉등처’라는 용어가 사용된다.

 

세종도 몇 차례나 주민 이주정책을 실시하면서 김인우를 우산·무릉등처안무사로 임명하고 우산도와 무릉도의 두 섬을 순견(巡見)하는 임무를 맡긴다.『세종실록』「지리지」는 당시 조선의 통치영역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자료로서 조선이 쇄환정책을 계속 유지했으나, 우산도와 무릉도가 모두 여전히 조선의 통치하에 있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한편, 왜구의 침략이 줄어들자 강원 도민들이 본토의 조세부과와 역의 동원을 피해 울릉도와 독도로 피역하는 수가 증가하게 된다. 이에 강원도 감사 유계문은 무릉도의 우산이 비옥하여 산출이 많고, 또한 사람이 없어 왜노들이 점거할 우려가 있으니 무릉도에 군현을 설치하고 백성을 살게 하자고 주장한다. 하지만 세종은 육지에서 멀고 바람과 파도가 심하니 대신 매년 사람을 보내 탐색을 하고 토산물을 채취하라는 뜻을 전한다.

 

임진왜란 이후 통치력이 많이 약화되어 있던 조정은 김연성과 군사 260명을 울릉도로 보내 정세를 살폈다. 이는 동해안 어민의 쇄환과 울릉도가 자국의 땅임을 확인코자 한 중앙정부의 순심정책을 엿볼 수 있고, 또한 강원도의 삼척영장이 이를 맡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숙종 19년에는 좌수영 소속의 능로군으로 복무했던 어부인 안용복이 고기를 잡고자 울릉도에 들어갔다가 일본의 어부들과 시비가 벌어져 일본으로 납치된 사건이 일어난다. 안용복은 당대 최고 실권자인 에도관백(關白)에게서 “울릉도와 자산도는 일본 땅이 아니기 때문에 일본 어민들의 출어를 금지 시키겠다”는 서계를 받는다. 하지만 곧 대마도주에게 빼앗기고, ‘월경죄인’으로 감금당한다. 풀려난 안용복은 분개하며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독도와 울릉도가 우리 땅임을 명백히 하고 돌아온다. 그의 활약으로 인해 대마도주는 일본인의 울릉도 출어금지를 공식화한다. 안용복의 활동은 일본의 영토 편입 야욕으로부터 울릉도와 독도를 지켜내고, 일본의 최고 권력기관으로부터 조선의 영토임을 인정받았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조선은 1895년 도감제(島監制)를 실시하여 울릉도를 행정 관할한다. 울릉도의 인구가 1899년에는 2,000명에 이르자, 대한제국은 울릉도를 다시 시찰하고 1900년 10월 25일 칙령 제41호를 반포해 울도군(鬱島郡)을 신설한다. 그리고 울도군의 관할구역을 관보 1716호에 수록함으로써 법적인 효력을 지니게 된다.

 

하지만 당시 울릉도에는 이미 일본인들이 상당수 들어와 규목을 도벌해 가고 있었다. 1903년 울도군수 심흥택이 보고한 바에 따르면, 일본인의 호수는 63호이며 벌목의 한정이 없어 일본순검에게 처음부터도 불법이었고, 이제부터 더 이상의 벌목은 금한다고 하니 “이 섬에서 벌목한 것이 이미 10년이 지났고, 한국정부와 일본 공사가 교섭하여 명령한 바가 없으니 이를 금단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는 당시 대한제국의 힘이 일본의 침투에 대해 무능하였음을 보여준다.

한편 일본은 러일전쟁을 거치며 중요성을 깨닫게 된 독도에 해군 망루를 세우고 무선전신을 설치하고자, 1905년 1월 28일독도의 일본영토 편입을 결정한다. 뒤늦게 이 사실을 정부에서 알고 반박하지만,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해 항의할 데가 마땅치 않았다. 조선통감부가 설치된 뒤에 「한일어업협정」, 「한국어업법」이 제정·공포된다. 이것이 시행됨에 따라 한국어민은 까다로운 허가절차를 거쳐야 했고, 고스란히 연안어장을 일본어민에게 내어주게 된다. 또한 일본은 1942년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대규모 공출과 징병, 징용을 행한다. 울릉도라고 이를 피해갈 순 없었고, 명이, 쑥, 칡 등을 먹고 생명을 이어나가야 했다.

 

일제 강점기의 사료 중 독도에 관한 언급은 일본 해군성 수로부에서 만든 『일본수로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합방 이전의『조선수로지』와 그 이후의 『일본수로지』에는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의 영토로 표기하고 있다. 독도를 울릉도로부터 떼어내어 일본의 영토로 설명하기 시작한 것은 1952년 이후부터이다.

일본의 항복으로 해방이 되지만, 곧이어 남북이 분단됨에 따라 우리나라의 영토주권은 심하게 훼손되기에 이른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46년 1월 29일연합국 최고사령부는 지령(SCAPIN) 제677호를 발표해 울릉도와 독도, 제주도는 일본영토에서 제외된다는 언급을 한다. 이어 6월 22일 SCAPIN 제1033호에서 일본의 영역을 더욱 분명히 규정하면서, 독도의 12해리 이내에 접근하지 못한다는 지령을 내린다. 이로써 국제적으로 울릉도와 그 부속도서가 대한민국의 영토임을 명백히 인정받게 된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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